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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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는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되었으며, 5·16 군사 정변 이후 민정이양의 형식으로 치러졌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4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윤보선 후보는 45.1%를 득표했다. 이 선거는 5·16 군사 정변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띠었으며, 지역별 지지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박정희는 경상도, 전라도, 부산광역시에서, 윤보선은 서울특별시,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우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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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라남도는 85.28%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윤보선 후보가 68.59%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 |
---|---|
지도 정보 | |
![]() | |
선거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선거 유형 | 대통령 |
이전 선거 |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60년 8월 |
다음 선거 | 196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67년 |
선거일 | 1963년 10월 15일 |
투표율 | 85.0% |
후보 1 | |
![]() | |
후보 | 박정희 |
정당 | 민주공화당 |
득표수 | 4,702,640 |
득표율 | 46.6% |
후보 2 | |
![]() | |
후보 | 윤보선 |
정당 | 민정당 |
득표수 | 4,546,614 |
득표율 | 45.1% |
후보 3 | |
후보 | 오재영 |
정당 | 추풍회 |
득표수 | 408,664 |
득표율 | 4.05% |
선거 결과 | |
당선자 | 박정희 |
당선 정당 | 민주공화당 |
이전 대통령 | 박정희 (권한대행) |
이전 대통령 소속 정당 | 국가재건최고회의 |
2. 경과
5·16 군사 쿠데타로 출범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민정 이양 방침에 따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1962년 12월 17일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로 승인되었고, 12월 26일부터 시행된 헌법에 따라 제2공화국의 책임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회귀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예비역으로 편입되고, 다음 날 31일 민주공화당 총재에 취임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2]
야당에서는 윤보선(민정당), 허정(국민의당), 송요찬(자유민주당) 등이 출마하였다. 선거는 9월 5일에 공고되었고, 9월 15일에 후보 등록이 마감되어 7명이 출마하였다.
선거 운동 기간 중 10월 2일 허정, 10월 7일 송요찬이 "야당 후보 단일화"를 명분으로 출마를 포기하여, 사실상 박정희와 윤보선의 양자 대결이 되었다.
2. 1. 배경
5·16 군사정변으로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고, 민정 이양 형식으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1962년 12월 17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여 권력 구조를 대통령제로, 선거 제도를 제1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되돌려 놓았다.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출범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민정 이양 방침에 따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1962년 12월 17일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로 승인되었고, 12월 26일부터 시행된 헌법에 따라 제2공화국 시대의 책임내각제에서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강력한 행정권을 가지는 대통령제로 회귀하였다.[2]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예비역으로 편입되고, 다음 날인 8월 31일 민주공화당 총재에 취임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2]
2. 2. 야권의 상황
5·16 군사 정변으로 민주당 정권이 붕괴된 후, 민정 이양 형식으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여권은 민주공화당으로 통일되었으나, 야권은 여러 정당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신민당 출신 인사들은 민정당을, 민주당 출신 인사들은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자유당이나 무소속 출신 인사들은 자유당, 신정당, 민우당, 정민회 등을 창당하였다. 친여 정당으로 출발했던 자유민주당도 야권으로 성향이 바뀌었다.[5]민정당, 신정당, 민우당 등은 국민의당으로 합당하고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윤보선 측과 허정 측이 서로 양보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민주당은 장면 전 국무총리가 정치활동 규제를 당해 후보를 내지 않았지만, 민정당의 윤보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다.[5]
민간 정치인들은 박정희에 맞서 단결하기보다는 여러 정당으로 심하게 분열되었다. 5월 14일, 윤보선과 그의 추종자들은 민정당을 창당하고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전 국무총리 허정을 후보로 지명한 신정당도 민간 정치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5]
윤보선은 두 후보가 모두 출마할 경우 박정희가 쉽게 승리할 것이 분명해지자, 민간 정치인들이 하나의 정당 아래 단결할 것을 제안했고, 신정당은 이에 동의했다. 한국민주당은 9월에 공식적으로 창당되어, 민정당, 신정당, 그리고 전 국무총리 이범석의 민주친목당을 통합했다. 그러나 윤보선과 허정 중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할지에 대한 합의에 실패한 후, 9월 13일 민정당은 한국민주당에서 분당하여 윤보선을 공식적으로 재지명했다. 한국민주당에 남은 허정과 이범석의 세력은 허정을 지명했다.[5]
10월 2일, 허정은 대통령직 입후보를 철회하고 박정희를 물리치기 위해 윤보선을 지지했다.[5][6]
2. 3. 야권 단일화 운동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민정당, 허정 전 국무총리가 이끌던 신정당 등 보수 야권 정당들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 정권이 출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였다.1963년 7월 5일, 윤보선 후보가 야권 통합을 위해 후보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야권의 통합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이로써 민정당, 신정당, 민우당 등은 국민의당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통합 야당 국민의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정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윤보선 전 대통령, 김병로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이범석 민우당 고문 등이 불출마를 선언한 가운데, 국민의당의 후보 지명전은 신정당에서 내세운 허정 신정당 창준위원장과 김도연 전 신민당 위원장의 양자 대결로 좁혀졌다. 그러나 인지도와 지지도 면에서 김도연은 허정에게 밀렸고, 결국 김도연은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며, 민정당은 다시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민정당 측과 신정당 측은 끝내 후보를 합의하지 못했고, 결국 윤보선 후보와 허정 후보 둘 다 출마하여 야권 통합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선거 운동 개시 후 선거는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민정당 후보의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고, 결국 허정 국민의당 후보는 10월 3일 야권 단일화를 위한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10월 12일에는 송요찬 자민당 후보도 사퇴를 선언하고 윤보선 지지를 선언해, 사실상의 야권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선거 초기에는 기대를 모았던 허정이 이미 약세가 현저히 드러난 상황에서 뒤늦게 사퇴했음으로 단일화의 효과는 크지 않았다.[5][6]
2. 4. 사상 논쟁
윤보선 후보 측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으며 색깔론을 제기했으나,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7] 훗날 박정희 정부 하에 투옥되기도 하는 임헌영은 자신은 당시 윤보선이 박정희가 좌파라며 공격하는 것을 보고 주변인들에게 박정희를 찍으라고 운동하고 다녔다고 술회하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리석어 당시의 진보 세력들의 한계를 느끼게 해준다, 윤보선의 매카시즘이 오히려 자신을 낙선시킨 것"이라고 말했다.3. 후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출범한 군사 정권은 민정 이양 방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주요 후보로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민정당 윤보선, 국민의당 허정, 자유민주당 송요찬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추풍회 오재영, 정민회 변영태, 신흥당 장이석 등이 출마하였다.
야권에서는 후보 단일화가 주요 쟁점이었는데, 허정과 송요찬은 "야당 후보 단일화"를 명분으로 사퇴하여, 선거는 사실상 박정희와 윤보선의 양자 대결로 좁혀졌다.[5][6]
3. 1.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은 1963년 5월 27일 전당대회를 열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박정희 후보는 8월 31일 다시 열린 전당대회에서 후보직을 수락하였다.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부를 이끌었던 박정희는 1963년 4월 8일, 대통령에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는 그가 군사 통치를 4년 더 연장할 계획을 발표한 후 미국이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한 데 따른 것이었다.
군부는 2월에 민주공화당을 결성했고, 박정희는 10월에 대통령 후보로 민주공화당의 지명을 받았다.
3. 2. 민정당

신민당 출신 인사들로 결성된 민정당은 1963년 5월 14일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5] 그러나 윤보선 후보는 7월 5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민정당은 야권 통합 운동에 참여했으나, 후보 단일화 협상이 결렬되자 9월 12일 다시 전당대회를 열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재추대하였다.[6]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민정당, 허정 전 국무총리가 이끌던 신정당 등 보수 야권 정당들은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군사 정권이 출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야권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였다.
1963년 7월 5일, 윤보선 후보가 야권 통합을 위해 후보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야권의 통합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이로써 민정당, 신정당, 민우당 등은 국민의당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통합 야당 국민의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정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윤보선 전 대통령, 김병로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이범석 민우당 고문 등이 불출마를 선언한 가운데, 국민의당의 후보 지명전은 신정당에서 내세운 허정 신정당 창준위원장과 김도연 전 신민당 위원장의 양자 대결로 좁혀졌다. 그러나 인지도 면에서나 지지도 면에서나 김도연은 허정에게 밀렸고, 결국 김도연은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며, 민정당은 다시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민정당 측과 신정당 측은 끝내 후보를 합의하지 못했고, 결국 윤보선 후보와 허정 후보 둘 다 출마하여 야권 통합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선거 운동 개시 후 선거는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와 윤보선 민정당 후보의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고, 결국 허정 국민의당 후보는 10월 3일 야권 단일화를 위한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였다. 10월 12일에는 송요찬 자민당 후보도 사퇴를 선언하고 윤보선 지지를 선언해, 사실상의 야권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선거 초기에는 기대를 모았던 허정이 이미 약세가 현저히 드러난 상황에서 뒤늦게 사퇴했음으로 단일화의 효과는 크지 않았다.
3. 3. 국민의당
국민의당은 1963년 9월 14일 전당대회를 열고 허정 신정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5][6]그러나 허정 후보는 선거전 내내 윤보선 민정당 후보에게 크게 뒤지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10월 3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이는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를 꺾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3. 4. 자유민주당
자유민주당은 1963년 9월 5일 중앙상무위원회를 열고 송요찬 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만장일치 추대하였다. 송요찬은 육군참모총장 출신으로 박정희의 군 선배이지만, 오히려 박정희의 민정 참여와 민주공화당 창당 등에 비판적이었다.그러나 송요찬 후보는 10월 7일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직을 사퇴하였다.[8]
3. 5. 군소 후보
자유당은 1963년 9월 8일 중앙위원회를 열고 장택상 전 국무총리를 대통령 후보로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장택상 후보는 9월 13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하여 후보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하였다.[9]정민회는 1963년 8월 29일 창당대회를 열고 변영태 전 국무총리를 대통령 후보로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추풍회는 1963년 9월 11일 전당대회를 열고 오재영 전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신흥당은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 계룡산 산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후보 등록을 하지 못했던 장이석 씨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이름 | 정당 | 비고 |
---|---|---|
변영태 | 정민회 | |
오재영 | 추풍회 | |
장이석 | 신흥당 |
4. 선거 결과
1963년 10월 15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46.6%의 득표율로, 45.1%를 얻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박정희 후보는 5·16 군사정변으로 군정을 이끌다 미국의 경제 원조 중단 위협에 굴복하여 민정 이양을 약속하고 대선에 출마하였다.
박정희 후보의 승리 요인으로는 야당의 자금난과 분열, 그리고 민주공화당의 막대한 자금 동원력이 꼽힌다.
4. 1. 전국 결과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4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는 45.1%를 득표하여 박정희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다.- '''투표일''': 1963년 10월 15일
- '''선거인''': 12,985,015명
- '''투표자수''': 11,036,175명
- '''투표율''': 85.0%
- '''유효투표 총수''': 10,081,198표
당락 | 후보자 | 당파 | 득표수 | 득표율 |
---|---|---|---|---|
당선 | 박정희(朴正熙) | 민주공화당 | 4,702,640 | 46.6 |
윤보선(尹潽善) | 민정당 | 4,546,614 | 45.1 | |
오재영(吳在泳) | 추풍회 | 408,664 | 4.1 | |
변영태(卞榮泰) | 정민회 | 224,433 | 2.2 | |
장이석 | 신흥당 | 198,837 | 2.0 | |
합계 | 10,081,198 | |||
시·도 | 박정희 (민주공화당) | 윤보선 (민정당) | ||
---|---|---|---|---|
득표수 | 득표율 | |||
서울특별시 | 371,627 | 30.2% | 802,052 | 65.1% |
경기도 | 384,764 | 33.1% | 661,984 | 56.9% |
강원도 | 296,711 | 39.6% | 368,092 | 49.1% |
충청북도 | 202,789 | 39.8% | 249,397 | 48.9% |
충청남도 | 405,077 | 40.8% | 490,663 | 49.4% |
전라북도 | 408,556 | 49.4% | 343,171 | 41.5% |
전라남도 | 765,712 | 57.2% | 480,800 | 35.9% |
부산광역시 | 242,779 | 48.2% | 239,083 | 47.5% |
경상북도 | 837,124 | 55.6% | 543,392 | 36.1% |
경상남도 | 706,079 | 61.7% | 341,971 | 29.9% |
제주특별자치도 | 81,422 | 69.9% | 26,009 | 22.3% |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1] 득표율은 「역대선거정보시스템」에서 인용한 득표수를 바탕으로 계산한 것이다.
박정희 후보는 야당의 분열과 자금난, 그리고 민주공화당의 막대한 선거 자금 투입에 힘입어 승리하였다. 지역별 득표 현황을 보면, 윤보선 후보는 서울특별시,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우세했고, 박정희 후보는 전라도, 경상도, 부산광역시에서 우세했다. 특히 전라남도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28만 표 이상 앞섰다는 점은, 이후 심화된 지역 갈등이 이 시점에는 심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2]
4. 2. 지역별 결과
(민주공화당)(민정당)